검색결과 리스트
글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우리들의 목소리 –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1주기에 즈음하여
|| 본 글은 2017-05-29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존재 자체로 위협을 받는 사람들
지난 17일 수요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일 년 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포스트잇을 들었다. 같은 날 새벽 청주의 어느 화장실에서는 성폭행을 하려는 남성에게 구타당하던 한 여성이 겨우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그 전날인 16일 대한민국 군 검찰은 한 동성애자 남성 육군대위에게 ‘군형법 92조의6’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구형했고, 일주일 후인 24일 군사법원은 “동성 군인과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해당 판결이 난 24일, 한 여성 해군장교는 직속상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이 사건들에는, 각각 명백한 대상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차별과 폭력은 그 뿌리가 깊이 뒤얽혀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을 살해한 남성은 “내가 여성들로부터 여러 피해를 당했”고 “평소 여성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사건이 조현병 환자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묻지마 살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여성혐오(misogyny)에 의한 여성살해(femicide) 사건을 마주한 국가 권력의 선택은, 여성이라는 특정 사회집단에 대한 차별, 혐오, 폭력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도모하는 대신 또다른 사회적 약자 집단인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 혐오, 폭력으로 덮는 것이었다.
‘군형법 92조의6’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육군 대위는 사적 공간에서 업무상 관련 없는 상대와 합의된 성관계를 가졌다. 이 상황에서 유죄 판결의 유일한 증거는 상대가 동성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판결은 명백하게 국가가 저지른 성소수자 혐오 사건이다. 만약 그가 이성애자였다면 그는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군 검찰이 해당 대위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던 5월 16일의 다음날인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이었고,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법정에서 쇼크를 받고 쓰러지며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가 쓰러지던 날 옆 동네 대만에서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다.
당신의 평화는 우리들의 강요당한 침묵으로 가능한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았음에 안도해야 하는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이다. 이 사회는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연령, 장애, 경제적 계급, 사회적 신분, 혼인여부, 출신국가, 인종, 종교, 용모 등의 신체조건, 병역 등 수많은 기준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고 집단을 나누어 차등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수많은 기준들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 ‘미성년’자에게는 일상이 전쟁이고, 매일 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누군가는 ‘나는 이 사회에 그런 정도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금까지 누려온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자 한다. 강남역에 모여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는 여성들 앞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남성도 군대 가서 죽고 일하다 죽는 사회적 약자”라고, “남자 여자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고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렇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나중에”를 외친 대선후보와 그를 함께 연호한 이들이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어떤 기준 하나쯤에는 반드시 차별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못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못했기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에 부합하지 않/못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지금까지 누려온 ‘평화’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의 입을 막고 존재를 지움으로써 유지되는, 일상이 된 권력이었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81)가 이미 30년도 전에 일찍이 외쳤던 것처럼, “당신의 평안은 나의 침묵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분석이 2017년에도 유효할 줄 그녀는 알았을까.
이제야 터져나온 목소리들로 인해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보스몹 한 마리 잡아서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면 참 좋겠는데, 이토록 촘촘하게 우리 모두를 옭아맨 차별과 혐오는 그렇게 쉬이 답안지를 내어주지 않는다. 2017년 3월 10일 ‘보스몹’ 박근혜를 끌어내렸다고 이 사회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이. 이 사회 구석 구석 다양한 측면과 층위에서 작동하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지금껏 주류 사회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런 차별과 혐오는 없다’고 ‘평화’를 가장하거나, ‘분열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평화’를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수많은 차별과 혐오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에 사회 전체가 민감해질 때에야 비로소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 위계질서, 지배, 통제와 복종, 우월성, 획일성 등의 군사주의적 가치와 태도를 뿌리깊이 내면화한 사회에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실현하려면 폭력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평화가 가장 요구되고 강조되는 때는 평화로울 때가 아니라 평화가 부재할 때, 즉 폭력이 발생할 때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민감해지는 감각을 기르는 것, 현상 뒤에 가려진 폭력의 맨얼굴을 읽어내고 긴밀하게 그러나 교묘하게 연결된 폭력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는 분석력을 기르는 것, 그럼으로써 누군가에게 가해진 폭력이 결코 나와 무관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다른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평화의 문화를 단단히 뿌리내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정의로운 방향으로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그런 것이다.
“(억압받아온 여성,)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온 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정희진의 말처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온 이들이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질수록 그들의 강요당한 침묵으로 유지되어 온 부정의한 사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꽤나 오래 전부터 목이 터져라 소리질러왔지만, 이제야 겨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지만 > 함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징병제는 과연 ‘평등’을 가져올 수 있을까? (0) | 2020.01.27 |
---|---|
구럼비의 무덤 위에서 바다와 제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 2018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 ‘바다사랑 제주사랑 문예제’에 부쳐 (0) | 2020.01.27 |
시국이... (0) | 2016.09.29 |
Gay 학생대표의 환영인사 (0) | 2014.09.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자본과 결탁한 군사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두 가지 방식-2017 서울인권영화제 ‘자본의 톱니’ 세션 후기
|| 본 글은 2017-06-27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이라크의 우간다/시에라리온 소년병 출신 용병과 한국의 필리핀 여성
솔직히 말하면, 세션의 제목이 ‘자본의 톱니’라는 걸 영화 두 편을 모두 보고서야 알았다. 아니, 알게 되기 전에 깨달았다. 세션을 구성하는 영화 두 편의 선택은 그만큼 절묘했다. 초국적 민간군산업체에 고용되어 미국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이제는 성인이 된 우간다/시에라리온 출신 소년병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덴마크, 2016), 그리고 주한미군을 상대로 운영되는 한국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담은 <호스트 네이션>(한국, 2016). 두 편의 영화는 얼핏 전혀 다른 듯 보이는 각각의 주제를 치밀하게 파고들며 관객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권력과 결탁한 초국적 자본은 그 비대한 몸뚱이를 더욱 불리기 위해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취약한 이들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 – 자본이 가장 가난한 남성을 착취하는 법
원제는 “The Child Soldier’s New Job(소년병의 새로운 직업)”이다. 원제보다 번역 제목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을 더 잘 짚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번 양보해서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전쟁이 ‘나의 국가/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 행위’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해도, 현대의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는 사뭇 다르다. 전쟁은 새로운 산업, 그것도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 된 지 오래다. 정치/경제학에서 이른바 “철의 삼각동맹(Iron Triangle)”으로 불리는 정치권(권력)-자본(돈)-군대의 이해관계가 얽힌 긴밀하고 은밀한 유착은 군사안보와 치안의 영역을 민영화함으로써 돈벌이의 기회를 창출한다. 전쟁이 이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전쟁을 필요로 한다.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다국적 석유 시추 및 건설업체이자 오랫동안 민간군수기업 ‘켈로그 브라운 & 루트 (Kellogg Brown & Root)’의 모회사이기도 했던 ‘핼리버튼(Halliburton)’의 CEO가 되었고, 핼리버튼은 부시 정권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 등지에서 각종 전후 ‘재건’ 사업 등의 계약을 독점하며 엄청난 전쟁 특수, 즉 전쟁부당이익(war profiteering)을 누렸다. 역시 이라크 ‘재건’ 사업으로 거대한 이윤을 축적해오고 있는 건설 및 군수 업체 벡텔(Bechtel)의 회장은 미국 재무장관, 국무장관 등을 지낸 조지 슐츠다.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국무장관 시절 세계 최대 군산복합체인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s), 보잉(Boeing) 등과 긴밀한 정치적/사업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이메일 스캔들을 통해 폭로되었고, 2016년 대선 과정에서도 후보들 중 민간군수산업체로부터 5억여 원에 달하는 가장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영화에서 주되게 조명하고 있는 영국의 세계적 군수산업체 이지스(Aegis)의 회장인 니콜라스 솜즈는 전 영국 국방부장관 출신이다.
전쟁의 민영화를 통해 자본, 즉 민간군수업체는 전 세계 곳곳에서 피묻은 돈을 벌어들이고, 정치권과 군대는 사업 계약을 따내고자 하는 민간군수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정치자금 후원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민간군수업체의 용병을 이용한 전쟁 수행은 정치권과 군대가 자국 군인의 부상, 사망, 적대국에의 억류 등에 대한 정치적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일 뿐만 아니라, 민간인 사상 등의 책임을 민간업체에 떠넘김으로써 회피할 수 있는 편리한 방식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방부가 직접 관여했을 때는 중대한 도덕적, 정치적 이슈가 되지만, 민간업체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적 민간군수기업으로 급부상한 사설보안업체 블랙워터(Black Water)의 설립자인 에릭 프린스는 이라크에서 민간인 학살 등으로 블랙워터에 대한 비난과 소송이 이어지자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무마하고자 했다. 블랙워터는 엑스이(Xe)를 거쳐 아카데미(Academi)로 이름만 바꾼 채 현재까지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군수산업체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에릭 프린스 역시 곧바로 새로운 용병업체 R2(Reflex Responses)를 만들어 아랍에미리트 정부에 군사 및 보안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들어선 최근에는 트럼프와 푸틴의 비선 연결고리로 지목받고 있기도 하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운영되는 민간군수업체의 용병모집은 최대수익을 내기 위해 가장 값싼 군인을 찾아 가장 가난한 나라로 옮겨가고, 미군이 빠져나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한 달에 250달러를 받고 미국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시에라리온과 우간다 출신 용병들이다. 정치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수치심을 모르고 굴러가는 자본의 톱니 사이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남성들은 이렇게 빨려들어간다.
<호스트 네이션> – 자본이 가장 가난한 여성을 착취하는 법
동맹국의 군대를 자국 영토에 주둔시키는 국가를 뜻하는 용어 ‘호스트 네이션’. 영화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가장 취약한 여성들의 몸을 이용해 성애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스트’ 네이션이라는 의미가 한국에 한 겹 덧씌워진다. 카메라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혹은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버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미군 기지촌에서 성산업에 종사하게 되는 여정을 담담히 쫓으며 그 과정에 얽혀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입장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필리핀에서 여성들이 E-6(예술흥행)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합숙 훈련을 시키는 매니저 욜리, 욜리와 함께 여성들을 ‘관리’하고 비자 발급을 위한 노래 훈련을 시키는 한국인 브로커 ‘미스터 정,’ 한국에서 미군 클럽을 운영하는 업주 ‘파파 정,’ 그리고 힘들고 필리핀에 있는 딸이 그립기는 하지만 집에 돈을 보낼 수 있기에 견딜만 하며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필리핀 여성 마리아, 그와는 대조적으로 업주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받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망쳐 업주를 고소한 필리핀 여성 조이까지.
영화를 보기 전까지 가장 궁금했던 건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에서 사실상 국제 인신매매 알선 및 지원책인 매니저 욜리와 미스터 정, 파파 정으로부터 어떻게 인터뷰 수락을 받아냈을까 였지만, 영화를 보며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스스로를 인신매매 가해자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필리핀 여성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녀들을 도와주는 거라고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 당혹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을 보며,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나름의 답답함을 토로하기 위한 기회로써 인터뷰를 인식하고 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 욜리는 자신이 하는 일은 가난한 필리핀 여성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매춘부’를 알선해서 보내는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욜리와 함께 일하는 미스터 정 역시 자신이 진심으로 여성들을 아끼며 그녀들이 ‘좋은’ 클럽 업주를 만나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진지한 표정으로 피력한다. 한국의 클럽 업주 파파 정은 성매매 강요는 옛날에나 있을 수 있었던 일이며, 자신은 절대로 성매매를 강요하지 않고 간혹 성매매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여성들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결국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피해자’는 있다. 성매매를 강요한 클럽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업주를 고소한 조이,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하고 함께 고소를 진행한 다른 몇 명의 필리핀 여성들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익숙한 ‘피해자’ 상에 부합하지 않는, 한국행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필리핀 여성 마리아가 있다. 명백한 악과 명백한 선, 악마 같은 가해자와 순진한 피해자 같은 단순하고 정형화된 구도로는 이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연예 비자로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을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게 하는 상황을 ‘인신매매’로 규정하고 실제로 2013년 몇몇 업소에 장별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채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 인신매매 시스템의 작동은, 미군을 ‘접대(host)’하기 위해 불법을 묵인하는 한국 정부와 성매수자인 미군들에 대한 처벌은 전혀 하지 않는 주한미군 사이에 존재하는 오래된 암묵적 공조, 그리고 그 묵인을 이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다양한 개인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복잡한 다층적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국가 권력의 정치적 목적과 자본의 이윤 추구가 결탁한 이 거대한 암묵적 공조 시스템 속에서 착취되는 것은 여성의 몸, 그것도 가장 가난한 여성들의 몸이다.
자본의 톱니는 모두를 향한다
더 값싼 가격을 찾아 한 달에 10,000-12,000달러짜리 페루 및 콜롬비아 출신 용병에서 800달러짜리 우간다 용병, 급기야는 250달러짜리 시에라리온 출신 용병으로 대체되는 민간군산업체의 용병 모집과 전후의 가난한 한국인 여성에서 러시아 여성, 필리핀 여성, 최근에는 키르기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여성으로 옮겨가며 이어져 오고 있는 인신매매/성매매 산업의 여성 ‘모집’, 두 편의 영화가 보여주는 그 과정과 배경은 놀랍도록 많이 닮았다. 효율성과 이윤 추구가 극대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톱니는 그렇게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취약한 이들을 양분 삼아 이 순간에도 비대한 몸집을 굴리고 있다.
현재 가장 ‘가성비’ 가 좋다고 여겨지고 있는 시에라리온 소년병 출신 용병들을 지금 그 자리로 몰아간 것은 이지스 이전의 또다른 민간군사기업,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EO, Executive Outcomes)다. 1990년대 들어서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오랫동안 비(非)백인들을 억압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거대한 군대는 갈 길을 잃었다. 순식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 수많은 군인들은 일이 필요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영입한 EO는 시에라리온 분쟁에 개입하며 국제적 민간군사기업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10년이 넘는 처참한 전쟁 상황에서 수많은 가난한 시에라리온 소년들은 소년병으로 내몰렸고, 그들은 지금 가장 값싼 용병이 되어 이라크에서 미군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게 나와, 한국과 무슨 상관인가? 한국 역시 공적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많은 영역이 민영화 되어온지 오래고, 그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경찰의 묵인, 때로는 암묵적 공조 속에서 거리낌 없이 ‘단속,’ ‘철거,’ ‘경비,’ ‘치안’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설 용역경비업체들의 통제되지 않는 폭력은 이 사회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이미 몇 백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 민간 업체들은 국내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등 많은 분쟁 지역에서도 피묻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한국에서 ‘충분한’ 군사적 긴장이나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될 때, 돈벌이 수단을 잃은 세계적 수준의 공공/민간 군사력은 이윤을 찾아 어디로 어떻게 터져나갈 것인가.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여성들의 몸으로 대체된 인신매매/성매매 산업의 착취 대상 역시 멀지 않은 과거에 한국인 여성이었다. 그녀들을 “달러벌이 역군”으로 칭송하는 동시에 “양공주”로 멸시하며 한국 정부와 군대, 사회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여성들의 몸을 양분 삼아 전쟁의 상흔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착취당하는 몸의 주인의 국적이라는 것은, 국경을 넘어 오로지 이윤의 논리를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톱니는 끊임없이 다음 착취 대상을 찾아 굴러가고, 그 누구도 그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여성징병제는 과연 ‘평등’을 가져올 수 있을까?
|| 본 글은 2017-09-25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와 허프포스트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남성 활동가 바꿔주세요.” 한국 병역거부 운동 초기였던 2000년대 초반, 사무실에서 여성 활동가가 전화를 받으면 거의 틀림없이 나오는 반응이었다. “어디 군대도 안 다녀온 여자가,” 라는 말은 그로부터 15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징병제, 군인권, 군사주의, 무기거래, 방산비리 등 군대나 국방과 관련된 주제에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그런 반응들이 유난히 지긋지긋한 순간이면 ‘차라리 여성 징병제면 내가 병역거부 하고 이 소리 안듣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물론 한국에서 병역거부는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건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군필 남성과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발언권과 시민권을 얻고 싶다는 욕망의 발로일 거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여성에게도 병역을 통한 국방의무를 부과하자는 주장이 청와대 온라인 청원게시판에 올라왔다. 지난 14일 종료될 때까지 보름 여의 기간 동안 123,204명의 추천을 받았고, 1만여 개가 훌쩍 넘는 청원들 중에서 베스트청원 2위를 차지했다.
여성 징병으로 실현하는 “남녀평등”?!?
해당 청원은 주장의 근거로 ‘저출산으로 인한 병역 자원의 부족,’ ‘군 가산점 등 군필 남성에 대한 보상 혜택이 부족한 상태에서 “독박 국방의무”로 인해 발생하는 남녀 불평등’ 문제를 들고 있다. 주장의 내용이나 근거의 논리성 및 합리성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짚어주신 친절한 글들이 이미 여러 개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해당 청원 중심이 아닌 ‘여성 징병제’와 ‘성평등’을 중심으로 생각을 간략히 정리해보려 한다.
사실 여성의 군대 복무는 1980년대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비롯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앞세웠던 주장이기도 하다. 여성의 시민권과 사회적 발언권 획득을 위한 전략을 고민한 결과이자, 더 나아가 여성의 군대 참여를 통해 군대와 사회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성 및 위계가 희석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주장이었다. 한국에서도2000년대 초반 비슷한 맥락으로 여성 징병제나 여성의 군대 참여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논의되기도 했다. 여성의 군대 참여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은 다르지만 결론적으로는 여성이 군대를 감으로써 (남성이 “독박 국방의무”에서 벗어나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과 발언권을 얻든) “남녀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여성이 군대를 가면 “남녀평등”이 이루어질까? 다시 말하면, 여성이 군대를 다녀 온다고 해서 군필 남성들의 그것과 같은 시민권과 발언권이 여성에게도 생길까? 혹은 군대를 가는 남성들의 21개월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 ‘성평등’에 도달하게 될까?
“명예남성”과 “군대의 꽃” 사이
군대 내에서 여성군인들은 많은 경우 ‘명예남성’과 ‘군대의 꽃’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군인권센터에서 여군 인권 담당 간사로 일하고 있는 방혜린 활동가는 원래 해군 대위였으나 군 내부의 성차별적 문화와 반인권적 위계에 한계를 느끼고 제대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군 시절의 자신을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시각에 길든 명예남성”임과 동시에 “필요할 때에는 꽃처럼 피어있”기를 강요받았던 존재로 기억한다.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의 이미지 때문에 군대를 선택하고 노력 끝에 입대한 한 여성 군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전체 구보 훈련을 할 때 ‘여자보다 뒤쳐질거냐’며 남성 군인들을 자극하고 사기를 높이는 데 이용되는 대상 이상이 되지 못함을 경험하고 좌절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2017년 한국 최초의 여성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된 피우진씨가 대위 시절 ‘술자리에 여성군인을 보내라’는 군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고민 끝에 전투복을 입고 가도록 조치한 일로 ‘미운털’이 박혀 보직 해임을 당했던 일은 유명하다. 혹시 징병 등의 수단을 통해 여성 군인의 수가 많아지면 이러한 현상이 약화될까?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징병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여성군인은 주로 “전통적으로 여성화” 되었다고 여겨지는 비서, 교관, 간호사, 행정직 등에 배치되고 “남성 군인들에게 사기를 높이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남자 못지 않은’ 군인이기를 요구받는 동시에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군인들에게 성차별과 성폭력은 일상이다. 지난 5월에는 남성 상관에게 성폭행 당한 여성 해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발생했고, 9월 초에는 남성 해군 장교 두 명이 부하 여성 군인을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7년만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경우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범죄 문제는 이스라엘 징병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수십 년째 끊이지 않고 있는데, 가장 최근인 2016년 조사에서는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성희롱 및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2006년 영국 국방부는 여성 군인 일곱 명 중 한 명이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50퍼센트가 군대 내 성희롱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남성 군인은 대부분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겉으로 드러난 수치만으로도 군대 내 여성 군인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만, 그와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신고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 수면 아래의 피해들이다. 군인권센터의 방혜린 활동가는 해군 시절 아래 계급의 남성 부사관에게 성희롱과 성폭행을 당했지만 피해 여성 군인에게 오히려 ‘조심하라’고 교육을 시키는 군대라는 공간에서는 신고가 의미가 없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해군 여성 군인이 남성 상관 두 명에게 당한 성폭행 피해를 고소하는데 7년이나 걸린 이유는 성폭행을 당한 후 피해 사실을 처음 신고한 지휘관에게 오히려 또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군대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해왔다. 미국 보훈부(Department of Veteran Affairs, VA) 연구에 따르면 절대 다수의 미국 여성 군인들이 복무 중 강간(30%), 성폭행(71%), 성희롱(90%) 등의 성폭력을 당하지만 사건의 90퍼센트 정도는 신고되지도 못하고 있다.
이처럼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군대 문화와 제도 속에서 여성 군인은 그 견고한 벽에 균열을 내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바람직한 군인상’으로 여겨지는 남성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요되는 ‘여성’의 성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쉽다. 그것이 군대가 남성중심적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용인’하는 수준이다. 군대 밖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현실의 장벽은 너무나 견고해서, 여성이 군대를 감으로써 여성이 군필남성과 같은 시민권을 얻거나 군대가 조금 덜 남성 중심적인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기계적 평등이 아닌 모두를 위한 실질적 평등을
그렇다고 해도 계속 남자만 ‘독박(?)’ 쓰는건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최근 몇몇 북유럽 국가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징병제 논의를 얼핏 보면, 남성이 징집 대상이라면 여성 역시 징집이 되는 것이 ‘평등’을 위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 ‘선진국’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노르웨이가 2016년부터, 네덜란드와 스웨덴이 2018년부터 징집 대상에 여성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인용하기 위해서는 한국과는 매우 다른 사회문화경제적 배경과 도입 맥락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징병 대상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결정은 전 세계적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흐름과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고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군사주의의 확장 가능성이 확대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은, 언급된 세 북유럽 국가에서 여성 징병이 결정된 배경에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이라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남성만 징병되는 것이 남성에 대한 차별이기 때문에 여성도 징병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제도가 여성을 배제시킴으로써 성차별의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에 군대를 포함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징병 대상을 전국민으로 확대한다는 논리다. 여성이 군대를 가는 것이 남성과의 ‘동등한 대우’로 여겨지는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은 군대 이외의 사회 영역 전반에서의 성별격차가 실제로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에서 매년 발표하는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 GGI)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144개국 중 노르웨이는 세 번째, 스웨덴은 네 번째, 네덜란드는 열여섯 번째로 성 격차가 없는, 즉 성평등에 가까운 국가이다. 참고로 한국은 116위로 조사대상국 중 성 격차가 가장 큰 하위 20퍼센트에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는 모두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보장되는 국가로, 각각 1922년, 1902년, 1922년부터 다양한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할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맥락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여성의 군대 참여가 실질적 ‘성평등’을 위한 조치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모두에게 덜 폭력적이고 덜 차별적이며 덜 군사주의적이고 더 민주적인
경제, 교육, 건강, 정치 등 사회의 거의 전 영역에서 엄청난 성 격차로 성평등 수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쉽지 않은 한국에서, 여성을 군대에 보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성평등이란 없다. 이 사회에서 남성만이 징집 대상이 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남녀 불평등’이 아니라 21개월을 ‘잃어버린’ 남성들의 박탈감, 혹은 강요 당한 희생에 대한 분노다. 문제 해결의 출발은 21개월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환경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있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기를 거의 20년 째 반복하고 있는 군가산점제와 같은 망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케케묵은 헌재 판결을 들먹일 것도 없이 군가산점제는 공직에 뜻을 둔 극소수의 군필남성에게만 이득이 될 뿐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공직으로 나가지 않을 대부분의 군필남성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등 징병제도에서의 약자들)에게 차별적인 전시적 보상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우리를 억압하는 거대한 구조에 도전하는 것보다 내 옆의 개별 존재, 특히 나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훨씬 쉽지만, 그런 인식과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질적 사회 병폐로 고착시킬 뿐이다. 그보다 징집 절차의 투명성 및 공정성을 확보하여 특권 계층의 병역비리를 근절하고, 방위산업 비리 및 부패를 엄단하여 국방예산 집행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재고하는 것이 실질적 문제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동시에 군대를 조금 더 인권 친화적인 공간, 상식이 통하는 공간, 폭력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어서 군인들의 생활의 질과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하는’ 인권의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모두에게 덜 폭력적이고, 덜 차별적이며, 덜 군사주의적이고, 더 민주적인 인권의 상향평준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한 데 힘 좀 그만 빼고 정말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말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이제는 명확해 질 때도 되지 않았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지만 > 함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우리들의 목소리 –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1주기에 즈음하여 (0) | 2020.01.27 |
---|---|
구럼비의 무덤 위에서 바다와 제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 2018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 ‘바다사랑 제주사랑 문예제’에 부쳐 (0) | 2020.01.27 |
시국이... (0) | 2016.09.29 |
Gay 학생대표의 환영인사 (0) | 2014.09.03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