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 The Sexual Politics of Meat

오래전 글 복원 프로젝트 ①


기록의 목적,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지 되새겨보기 위한 목적. 

그렇게 끄집어 낸 첫 글은 2004년 5월 2일에 쓴 짧은 서평. 무려 10년 전 글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Carol J. Adams/류현 옮김(2003). 미토. 1990.

원제: The sexual politics of meat: A feminist-vegetarian critical theory. A&C Black.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정치가 구조화되는 방식은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된다.

...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별체계이다."

(pp.20, 12~14)



채식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채식주의와 페미니즘. 언뜻 생각했을 때 그 연관성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이란 실제 내 생활 전반을 채우고 있는 역동적 ‘실천’ 인 반면, 채식주의는 그저 나와는 다른 인간들의 취향이라는 정적 ‘개념’일 뿐이었다.


고기와 남성권력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육식의 성정치’라는 개념이다. ‘고기’와 ‘힘’, 그리고 ‘남성’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코드들의 연결고리는 이 사회에 우월한 성을 만들어내고 그 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배구조를 편성한다. 여기서 폭력적으로 소비되는 동물들은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투영한다. 실제로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동물에 여성의 성을 대입시킨 광고물들이나, 자신을 무력화된 고깃덩어리(‘동물’이 아니다)로 느끼는 경험을 갖는 억압받는 여성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살아 숨쉬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고기’와 같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된다. 흔히 시쳇말로 여성을 ‘따먹다’라고 표현되는 사실을 보아도 그것은 극명히 드러난다. ‘여성’과 ‘여성의 성(혹은 몸)’이 분리된다는 것,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마치 매일같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기를 먹어치우듯이. 육식의 성정치, 동물 성폭행과 여성 도살(즉 동물 도살과 여성 성폭행을 말함이지만, 바뀐다고 해서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채식주의 언어 등 다양한 면에서 이 책은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연관성을 역설하고 있다. 


머리와 가슴은 멀기만 하고...

내가 믿고 있는 페미니즘은 어느 특정성의 지배구조를 불신한다.(보다 정확히 말하면 차별과 억압을 생산해내는 모든 종류의 지배구조를 불신한다) 상호 배려에 의한 평화와 자유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꿈꾸는 나의 실천에서, 채식주의는 이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 같다. 아니, 차지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이제는 고기를 먹을 때 그것이 ‘고기’가 아니라 ‘동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즉 동물들이 자신의 의사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채 처절하게 도살당하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어설프게나마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미약한 윤리적 고통과 더불어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 외에도, 가부장적 소비를 거부하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또 다른 힘의 논리, 성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죽음의 소비에 참여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책에 의하면 모든 육식은 곧 우리의 식탁에 남성 권력을 재차 새겨 넣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작가가 말했듯이, 그리고 수미언니가 말했듯이 고기의 무의미성을 경험했다고 해서 곧바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느낀다. 머리로 깨달은 것을 선뜻 실천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거야’라고 자위하기엔 벅찬 버거움으로,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달 모임에서 언급되었던 ‘反육식’으로서의 채식이 아니라 음식 문화 자체의 정치와 위계, 그 계급성을 찾아내는 작업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덧1. 한국의 채식주의

요즘 웰빙(Well-being) 열풍으로 채식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덕분에 서점에 가면 채식요리책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채식주의 요리책을 들춰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목들이 참 독특하다. 채식 쇠고기 청경채 볶음, 닭고기맛 꼬치구이, 채식 통닭... 몇 안되는 채식주의 가게에 가도 보이는 메뉴는 채식 돈까스, 채식 햄버그 스테이크 등이다. 육식에 반대하며 채식을 하면서 채식을 통해 억지로 고기 맛을 느끼려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페미니즘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단순히 건강만을 위해 나온 것이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은 무의미 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비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페미니즘적 실천으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이러한 음식들을 찾는 경우를 보았으며 그런 것은 충분히 비판적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 덧2. 여성과 동물을 관통하는 줄기
바니걸(bunny girl)
미국 월간 남성잡지 플레이보이로 인해 세계적 섹시 심벌이 되어버린 풍만한 가슴에 토끼모양의 옷을 입은 바니걸.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영계(Hot Chick)
'영계', 한국에서는 가끔 어린 남성에게도 쓰이기도 하지만 외국에서는 Chick이라고 하면 어리고 몸매가 글래머러스한 여성을 일컫는다.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창에 ‘chicks’라고 쳐보자. 닭 사진이 많이 나올까, 어린 여성 사진이 많이 나올까?
 
 

* 덧3. 먹거리 위계, 먹거리 정치

고기는 채소보다 월등한(!) 음식. 그렇다면 고기보다 월등한 채소는? 요즘 웰빙(Well-being) 열풍이 불면서 더불어 뜬(?) 것이 유기농 채소이다. 유기농 채소란 화학비료, 유기합성 농약, 생장 조정제, 제초제, 가축사료 첨가제 등 일체의 합성화학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물과 자연광석, 미생물 등 자연적인 자재만을 사용하여 재배한 채소와 과일들을 말하는데, 그 가격이 일반 채소나 과일들의 두 배에 달한다. 즉 이제는 채소도 돈 없으면 못 먹는다... 이렇듯 기존의 고기-채소의 위계를 뛰어넘어 또 다른 위계를 창출하는 현대의 음식 정치를 짚고 넘어가자! ..고 말하고 싶어서 ‘소득 수준별 외식 문화’ 혹은 ‘소득 수준별 식탁 문화’등의 리서치 결과를 며칠간 찾아 헤메었으나 오픈 소스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안타깝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언젠가 꼭 이에 대한 연구를 해 보고 싶어졌다.

어쨌든,

‘反고기로써의 채식’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고기의 상징(즉 힘, 남성,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사회질서, 여성의 대상/객체화 등)’을 깨는 방법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 그것만은 확실하다.